단어 25,664개에 난이도를 매겨봤습니다 — '어려운 단어'의 기준은 무엇인가

단어 25,664개에 난이도를 매겨봤습니다 —

학생이 지문을 읽다 멈춥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때 교사가 해야 할 판단이 있습니다. 이건 외워야 하는 단어인가, 그냥 넘어가도 되는 단어인가.

이 판단을 사람이 매번 하면 기준이 흔들립니다. 어제는 넘어가라고 한 단어를 오늘은 외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ExamBuilder에서는 단어마다 난이도를 미리 매겨두기로 했습니다. 지금 사전에 25,664개 단어가 들어 있고, 전부 등급이 붙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을 정리합니다.

등급 분포

등급단어 수비중
초등2,0528.0%
중등3,48913.6%
고등6,48625.3%
수능6,70926.1%
심화6,92827.0%

처음 이 분포를 보고 좀 놀랐습니다. 심화 단어가 가장 많습니다. 초등·중등을 합쳐도 21.6%밖에 안 되는데, 수능·심화를 합치면 53.1%입니다.

직관과 어긋나는 결과처럼 보이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쉬운 단어는 개수가 적고 대신 자주 나옵니다. the, be, have 같은 단어는 몇 백 개뿐이지만 모든 문장에 등장합니다. 반대로 어려운 단어는 종류가 무한히 많고 각각은 드물게 나옵니다.

즉 단어 목록을 사전 순으로 세면 어려운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고, 실제 지문에서 만나는 빈도로 세면 쉬운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같은 데이터인데 세는 방법에 따라 정반대 그림이 나옵니다.

이게 어휘 학습에서 가장 흔한 착시의 정체라고 생각합니다.

등급을 어떻게 정했나

두 가지를 함께 봤습니다.

첫째, 실제 사용 빈도. 영어 전체에서 그 단어가 얼마나 자주 쓰이는지를 나타내는 지표가 있습니다. 흔한 단어일수록 값이 크고, 드문 단어일수록 작습니다. 이건 사람의 감이 아니라 대규모 말뭉치에서 나온 숫자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둘째, 교육과정상의 위치. 빈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빈도가 낮아도 교과서에 반드시 나오는 단어가 있고, 빈도는 높은데 학생이 배울 일이 없는 단어도 있습니다.

두 축을 겹쳐서 다섯 등급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 등급을 학생에게 보여줄 때는 숫자 대신 색과 이름으로 표시합니다. "Zipf 3.2"라고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까요.

뜻이 하나가 아니라는 문제

단어 25,664개에 뜻이 47,104개 달려 있습니다. 단어 하나당 평균 1.84개.

이 숫자가 어휘 학습의 진짜 난관을 보여줍니다. 학생이 단어를 "외웠다"고 말할 때, 보통은 첫 번째 뜻 하나를 외운 겁니다. 그런데 지문에서는 두 번째, 세 번째 뜻으로 나옵니다.

예를 들어 address는 '주소'로 외웁니다. 그런데 수능 지문에서는 대부분 '(문제를) 다루다, 해결하다'로 나옵니다. 학생은 그 단어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문장이 안 읽힙니다. 모르는 단어보다 이쪽이 더 위험합니다. 모르는 단어는 멈추기라도 하는데, 안다고 착각한 단어는 그냥 지나가면서 해석을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단어장을 만들 때 뜻을 하나만 싣지 않고 순서대로 다 싣기로 했습니다. 분량은 늘지만, 그 지문에서 쓰인 뜻이 세 번째라면 그걸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어떤 단어를 외워야 하나

등급을 매겨놓고 나서 정리된 원칙이 세 가지입니다.

1. 초등·중등 등급인데 모르면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전체의 21.6%밖에 안 되는데 지문에서는 계속 나옵니다. 여기 구멍이 있으면 뒤에 뭘 해도 안 됩니다.

2. 수능 등급은 뜻을 여러 개 확인해야 합니다. 이 구간 단어들이 다의어 비율이 높습니다. 첫 뜻만 알고 넘어가면 앞서 말한 함정에 빠집니다.

3. 심화 등급은 문맥으로 넘어가도 됩니다. 27%나 되지만 각각은 거의 안 나옵니다. 한 번 보고 다시 안 만날 단어를 외우는 건 시간 배분 실패입니다. 이런 단어는 앞뒤 문맥으로 대략의 뜻만 잡고 지나가는 훈련이 오히려 실전에 가깝습니다.

수능 영어에서 모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 상태는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출제진이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글을 읽어내는 능력이 측정 대상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남은 숙제

등급 체계를 만들어놓고도 아직 못 푼 게 있습니다. 숙어와 구동사입니다.

take off, put up with 같은 표현은 구성 단어가 전부 초등 등급인데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단어 단위로 난이도를 매기는 방식으로는 이걸 못 잡습니다. 별도 테이블로 관리하고는 있지만, 난이도를 어떻게 매길지는 아직 답을 못 냈습니다.

학생이 "단어는 다 아는데 해석이 안 돼요"라고 할 때, 상당수가 여기에 걸려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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