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xamBuilder에는 영어 지문이 16,456개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부 한글 해석이 붙어 있습니다. 예외 없이 전부입니다.
처음에는 이게 단순 작업인 줄 알았습니다. 영어를 한글로 옮기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몇 천 개쯤 쌓이고 나서, 이 작업이 사실은 "학습용 해석이란 무엇인가"를 매번 다시 정의하는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좋은 번역과 좋은 학습용 해석은 다릅니다
번역가가 잘 옮긴 문장은 한국어로 자연스럽습니다. 원문의 구조가 안 보입니다. 그게 좋은 번역입니다.
그런데 학생이 보는 해석은 그러면 안 됩니다. 학생은 그 해석을 읽고 영어 문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어가 너무 매끄러우면 영어 문장의 어느 부분이 그 한국어가 됐는지 짚을 수가 없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했습니다. 너무 직역하면 한국어가 이상해서 학생이 이해를 못 하고, 너무 의역하면 이해는 되는데 영어랑 연결이 안 됩니다.
결국 정한 기준은 이겁니다. 문장의 뼈대는 직역, 살은 의역. 주어와 동사의 관계, 수식하는 것과 수식받는 것의 관계는 영어 순서를 최대한 살립니다. 대신 관용적인 표현이나 한국어에 없는 구조는 과감하게 풀어씁니다.
분사구문에서 제일 많이 걸렸습니다
영어에는 있고 한국어에는 없는 구조가 몇 개 있는데, 그중 분사구문이 가장 자주 문제가 됐습니다.
..., creating an atmosphere of trust.
이 조각이 앞 문장에 붙어 있을 때, 이게 '~해서 신뢰의 분위기를 만든다'인지 '~하면서 신뢰의 분위기를 만든다'인지 '그 결과 신뢰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인지는 문법이 안 알려줍니다. 앞 내용을 읽고 판단해야 합니다.
기계에 맡기면 십중팔구 '~하면서'로 옮깁니다. 가장 무난하니까요. 그런데 원문이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었다면 그 해석은 틀린 겁니다. 틀렸다고 티도 안 납니다. 문장이 말이 되거든요.
이런 조용한 오역이 학습에서는 특히 나쁩니다. 학생이 "아 이건 동시동작이구나"라고 잘못 배우고 넘어갑니다.
대명사가 가리키는 것
두 번째로 많이 걸린 건 대명사입니다.
영어는 they, it, this를 계속 씁니다. 한국어는 그렇게 안 씁니다. 한국어에서 '그들은'을 반복하면 글이 이상해집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기려면 대명사를 실제 명사로 바꿔줘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대명사를 명사로 바꿔주면 학생이 편합니다. 편한데, 대명사가 뭘 가리키는지 찾는 훈련을 못 합니다.
수능 영어에서 대명사 지시 대상 파악은 실제로 자주 묻는 능력입니다. 순서 배열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A)의 첫머리에 나온 they가 앞 단락의 무엇을 받는지 못 찾으면 순서를 못 맞춥니다.
해석이 이미 답을 알려주면 그 훈련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대명사는 가급적 대명사로 남기되, 문장이 도저히 안 읽힐 때만 명사로 바꾸는 쪽으로 정했습니다. 완벽한 해법은 아닙니다.
문장을 쪼갤 것인가
영어 한 문장이 한국어 두 문장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대명사로 길게 이어진 문장이 특히 그렇습니다.
쪼개면 읽기 편합니다. 안 쪼개면 원문과 1:1로 대응됩니다.
여기서는 안 쪼개는 쪽을 택했습니다. 문장 단위로 영어와 한글을 짝지어 보여주는 화면이 있는데, 한 영어 문장에 한글 두 문장이 붙으면 대응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대신 한국어가 길어지는 건 감수했습니다.
읽기 편함보다 대응 관계를 택한 셈입니다. 학습용이니까요.
결국 남은 것
16,000개를 넘기고 나서 정리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해석은 정답이 아니라 징검다리입니다. 학생이 해석을 읽는 목적은 그 한국어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걸 딛고 영어 문장으로 건너가는 겁니다. 그러니 해석은 목적지가 아니라 다리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해석본을 보면 실력이 안 는다"는 흔한 말도 절반만 맞습니다. 해석을 읽고 끝내면 안 늡니다. 해석을 읽고 다시 영어로 돌아가서 어느 단어가 어느 뜻이 됐는지 짚으면 늡니다.
학생에게 해석본을 줄 때 이 한 마디를 같이 주면 다릅니다. "읽고 나서 영어로 다시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