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이 중요하다는 말에는 다들 동의합니다. 단어장을 여러 번 돌리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고, 지문을 여러 번 읽습니다.
그런데 반복했는데도 안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학생 탓으로 돌리기 전에, 반복 자체가 어디서 헛도는지를 봐야 합니다.
세 가지 지점이 반복해서 관찰됐습니다.
1. 같은 순서로 반복하면 순서를 외웁니다
단어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순서로 세 번 돌리면, 세 번째쯤엔 다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지문에서 만나면 모릅니다.
앞 단어가 뒤 단어를 불러오는 연결을 외운 겁니다. apple 다음에 banana가 온다는 걸 외웠지, banana 자체를 외운 게 아닙니다. 단어장 밖으로 나오면 그 연결이 없으니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해법은 순서를 깨는 것입니다. 페이지를 거꾸로 보거나, 무작위로 섞거나, 한글 뜻에서 영어를 떠올리는 방향으로 바꿉니다. 방향을 바꾸는 게 특히 효과가 큽니다. 영어→한글은 되는데 한글→영어는 안 되는 상태가 아주 흔하거든요.
2. 틀린 문제를 다시 풀면 답을 외웁니다
오답 노트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일주일 전에 틀린 문제를 다시 풀면 맞습니다. 그런데 실력이 는 게 아니라 답 번호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번이었다는 게 어렴풋이 남아 있고, 3번을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이걸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시 풀 때 왜 나머지 넷이 아닌지를 말하게 하는 겁니다. 정답 이유는 기억으로 댈 수 있지만, 오답 넷의 탈락 이유는 기억으로 못 댑니다. 매번 새로 판단해야 합니다.
오답 노트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답과 해설을 적어두면 다시 봐도 읽기만 합니다. 대신 "내가 왜 이걸 골랐는가"를 적어두면 그 판단 습관이 보입니다. 나중에 모아놓고 보면 자기 오답에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3. 이해한 것과 익숙해진 것을 혼동합니다
가장 알아채기 어려운 지점입니다.
지문을 세 번 읽으면 세 번째는 술술 읽힙니다. 학생은 "이제 이 지문은 완벽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건 이해가 깊어진 게 아니라 그 문장 배열에 익숙해진 것일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지문 앞에 서면 다시 원점입니다.
구별하는 방법은 다른 지문에 옮겨보는 것입니다. 이 지문에서 배운 것 — 이를테면 분사구문이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 — 을 다른 지문에서 찾아보게 합니다. 못 찾으면 아직 그 지문 안에만 있는 지식입니다.
같은 지문을 다섯 번 읽는 것보다, 그 지문에서 하나를 뽑아 다른 지문 세 개에서 확인하는 게 낫습니다.
반복이 통하는 조건
세 가지를 뒤집으면 조건이 나옵니다.
첫째, 매번 조건을 바꿔야 합니다. 순서, 방향, 형태 중 하나는 달라야 합니다. 완전히 같은 반복은 두 번째부터 효율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둘째,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답을 반복하면 답이 남고, 판단을 반복하면 판단력이 남습니다.
셋째, 반복 사이에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에 세 번 보는 것보다 사흘에 걸쳐 한 번씩 보는 게 낫습니다. 잊어버릴 만할 때 다시 만나야 기억이 강화됩니다. 잊기 전에 다시 보면 뇌가 굳이 붙잡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어떻게
학생에게 권하는 형태는 이렇습니다.
지문 하나를 공부했으면, 그날 한 번 더 보지 말고 사흘 뒤에 봅니다. 그때는 지문 전체를 다시 읽지 말고, 그 지문에서 뽑은 단어와 문장만 봅니다. 다시 일주일 뒤에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다른 지문을 봅니다.
같은 것을 세 번 보는 게 아니라, 같은 것을 다른 각도로 세 번 만나는 구조입니다.
반복이 실패할 때 대부분은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매번 똑같이 반복해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