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문 데이터를 정리하다가 길이를 재봤습니다. 감으로만 알던 걸 숫자로 보고 싶어서요.
ExamBuilder에 들어 있는 지문의 평균 길이는 890자, 약 150단어입니다. 가장 짧은 건 200자 남짓, 가장 긴 건 3,900자였습니다.
150단어. 이 숫자를 시험 시간과 함께 놓고 보면 꽤 많은 게 설명됩니다.
산수를 해보면
수능 영어는 70분에 45문항입니다. 앞쪽 17문항이 듣기이고 대략 25분을 씁니다. 그러면 남는 건 45분, 풀어야 할 건 28문항입니다.
한 문항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약 1분 36초입니다.
이 96초 안에 해야 할 일을 나열해보면 이렇습니다.
- 150단어짜리 영어 지문을 읽고
- 무슨 말인지 파악하고
- 선지 다섯 개를 읽고
- 하나를 고른다
선지 다섯 개도 짧지 않습니다. 빈칸이나 요약문은 선지 하나가 한 문장인 경우도 있어서, 선지만 50~80단어가 됩니다.
즉 96초에 200단어가 넘는 영어를 처리해야 합니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
여기서 나오는 결론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두 번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150단어를 두 번 읽으면 그것만으로 시간을 다 씁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되돌아 읽기가 시간 누수의 1위라고 적었는데, 산수로도 확인됩니다. 한 번에 읽어내는 능력이 곧 시간 관리입니다.
둘째, 모든 문항에 같은 시간을 쓰면 안 됩니다. 96초는 평균입니다. 목적·심경처럼 30초에 끝나는 문항이 있어야 빈칸에 2분 30초를 쓸 수 있습니다. 전 문항을 균등하게 96초씩 쓰는 건 사실상 어려운 문항을 포기하는 전략입니다.
셋째, 사전을 찾을 시간은 애초에 없습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평소 공부할 때 모르는 단어를 전부 찾아가며 읽는 습관이 든 학생은 시험장에서 그 습관을 못 버립니다. 찾을 수 없으니 대신 멈춥니다.
길이보다 중요한 것
다만 길이가 난이도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데이터를 보면 가장 긴 지문이 가장 어려운 지문이 아니었습니다.
3,900자짜리 지문은 대부분 장문 독해입니다. 한 지문에 두세 문항이 딸린 유형이요. 이런 지문은 길지만 대체로 이야기 구조라 술술 읽힙니다. 읽는 데 시간이 걸릴 뿐 이해가 어렵진 않습니다.
반대로 200자짜리 짧은 지문이 훨씬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압축된 추상적 진술만 다섯 문장 들어 있는 글이요. 앞서 지문 난이도를 세 축으로 나눈 글에서 적었듯이, 어려움은 길이가 아니라 추상성과 문장 구조에서 옵니다.
그러니 지문이 길다고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긴 지문은 필자가 친절하게 풀어 쓴 경우가 많습니다.
연습에 적용하면
150단어와 96초라는 숫자를 알고 나면 연습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타이머를 지문 단위로 겁니다. 전체 시험 시간을 재는 것보다 이쪽이 낫습니다. 한 지문에 90초를 주고, 그 안에 읽고 답을 고릅니다. 처음엔 못 합니다. 못 하는 게 정상입니다.
못 끝냈을 때 무엇 때문인지를 적습니다. 단어에서 멈췄는지, 문장 구조에서 막혔는지, 선지를 여러 번 봤는지. 앞서 오답노트 글에서 적은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이유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충분히 정확해진 다음에 시간을 줄입니다. 순서를 반대로 하면 대충 읽는 습관만 붙습니다.
마지막으로
150단어는 사실 그렇게 긴 글이 아닙니다. 한국어로 치면 원고지 두 장이 안 됩니다. 국어 지문에 비하면 훨씬 짧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게 외국어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정보량을 처리하는 데 모국어보다 몇 배의 부하가 걸립니다.
이건 시간을 더 준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하 자체를 줄여야 하고, 그 방법은 결국 익숙해지는 것뿐입니다. 150단어짜리 글을 아주 많이 읽어서, 그 길이가 한 덩어리로 느껴질 때까지요.
지름길이 없다는 게 이 과목의 답답한 점이자 정직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